<비합리적 행위를 규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의 부재>
<비합리적 행위를 규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의 부재>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추진된 자유화․개방화로 우리나라가 경제 및 사회적으로 크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여 경제주체들이 비합리적 행위를 규율하기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즉 정부주도로 경제개발을 추진하였던 종래에는 경제주체들의 행위가 정부에 의해 어느 정도 통제․관리됨으로써 비록 최적의 효율성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으나 경제체제의 유지는 가능하였다. 그러나 자유화․개방화 이후에는 정부의 조정․통제 역할이 시장메커니즘 등으로 대체되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예컨대 기업의 행위를 견제․감시해야 하는 금융기관의 기능은 자유화 이후에도 활성화되지 못했다. 또한 자본시장의 비중이 높아졌음에도 주주에 의한 경영 감시가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다. 그리고 경영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공개도 미흡했던 데다 신용평가기관의 역할도 유명무실하였다.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감독도 적절하지 못했다. 자유화 이후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건전성 감독은 그 필요성만 인정되었고 실제로 유효하게 적용되지는 못했다. 또한 금융권간 비대칭적 규제로 일부 금융기관들은 규제 또는 감독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고수익-고위험을 추구하였고 이를 적절히 감시․감독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자유화 이후 정부-금융기관-기업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개별 경제주체들의 효용극대화가 사회 전체의 효용극대화로 연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경제상황이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정이 어렵다고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관대화(forbearance) 문제가 심화되는 경향이었다. 금융기관은 자체적인 경영혁신을 꾀하기보다는 정부의 암묵적 지급보장에 의존하여 수신고 증대를 중심으로 한 외형 확장 경쟁에 주력하였다. 특히 일부 금융기관은 대기업의 부도가 연쇄적으로 발생할 때 자체적인 손실만 줄이기 위하여 어음을 무차별적으로 교환에 회부하여 기업부도를 촉발하기도 하였다. 기업들도 경영합리화 등을 추진하기보다는 위험을 자금공급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부채거래에 내재된 맹점을 이용하여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였다. 더욱이 재벌 경영자는 계열 기업군의 상호지급보증 등을 활용하여 지극히 낮은 지분율을 기초로 거대기업을 장악하고 독단적․전횡적으로 기업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현대적 개념의 경제위기 즉 시장참가자의 급격한 신뢰 변화(swings in confidence)의 원인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자본자유화, 국내시장의 개방 등으로 그 동안의 외형적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한 외국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가 규율 부재로 인한 비효율성을 확인한 후 급격히 철수함으로써 1997년 경제위기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적절한 규율의 부재가 급격한 자유화정책의 추진과도 관련이 있으나 다양한 형태의 규율이 단시일 내에 형성될 수 없고 그것의 형성이 정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규율부재가 자유화 정책의 부작용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보다는 자율화 및 자유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부분적인 통제수단이 존속되었기 때문에 민간경제주체들의 자율적 견제․감시 기능이 살아나지 못한 측면이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관치금융, 정부우위의 경제운용방식 존속 등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관치금융의 종식이 자동적으로 규율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므로 규율의 부재 자체로서 그 원인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규율부재에 따른 각 경제주체들의 비합리성과 그에 수반한 경제적 비효율성, 그리고 조정의 실패 등이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