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필드 미션의 성립

한국은행(2010, p.22)에는 “ECA의 제안에 따라 1949년 6월 재무부장관 명의
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금융전문가의 파견을 요청”했다는 언급이 나온
다. 또한, “이 요청은 ... 1949년 2월 ECA를 대표하여 한국에 파견되었던 연준
간부[sic] Mr. Frank Tamagna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는 스프라울(A. Sproul) 뉴
욕연준 총재의 언급도 발견된다(Sproul, 1951; 조명근, 2007, p.212, 각주 4에서
재인용).
이와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출발점으로 관련 문서 기록을 추적한 결과, 이 글은
블룸필드 미션이 ‘주한ECA의 제안’이나 ‘ECA 대표로서 Mr. Tamagna의 제안’을
계기로 성사되었다고 단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좀 더 커다란 구조적 맥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장에서는 관련 문서 기록을 바탕으로 ECA
의 구상이 블룸필드 미션의 파견으로 구체화되기까지의 전체 과정을 시간 경과
에 따라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후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블룸필드 미션의 성립 과정(1948.12~1949.8)
가. 주한미사절단(AMIK)의 미션 파견 건의
한미원조협정의 체결을 이틀 앞둔 1948년 12월 8일, 서울의 주한미사절단
(AMIK: American Mission in Korea)은10) 미국 국무부장관을 수신인으로 하는
서신을 보내 “한국의 금융안정화프로그램을 수립하기 위한 금융전문가들로 구성
된 팀을 미정 기간(an indefinite period) 동안 배정해줄 것을 건의”했다(Strong,
1949). 이는 AMIK(특히 1949년 1월 가동 예정이던 주한ECA)이 금융안정화 프
로그램이 부흥원조를 통한 한국 경제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 처음부터 판단
한 것을 의미한다.
나. 미국 국무부의 답신(안)과 국무부-재무부-연준이사회 간 협의
AMIK의 미션 파견 건의 서신에 대한 답신(안)에서 국무부의 스트롱(G.
Strong)은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표시하되, 금융전문가 팀의 “속성 및 기능”과
“상대적 절박성” 등에 관한 세부적 질문과 “한국이 필요로 하는 금융자문의 일
반적 성격을 알아내기 위해 적임의 관찰자(observer) 1인이 간략한 상황 조사서
를 작성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제시했다(Strong, 1949).11) 이와 같은 내용의 답장
을 AMIK에 보내기에 앞서, 1949년 1월 스트롱은 자신의 답신(안)에 대한 의견
을 재무부와 연준이사회에게 먼저 물었다.
다. 미션 파견을 위한 사전 준비: ECA-연준 간 협력과 한국정부에
대한 ECA의 제안
국무부-재무부-연준 간 협의는 당시 호프먼(P. Hoffman) ECA처장이 맥케이브
(T. McCabe) 연준의장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연준 직원 1명의 한국 파견을 요청하
는 방향으로 진척되었다(Tamagna, 1949). 이에 따라, 스트롱이 앞서 제안한 ‘적임
의 관찰자’로서 연준이사회 직원인 타마냐(F. Tamagna)가 1개월(1949년 2월 22
일~3월 21일) 동안 ECA 대표 자격으로 방한했다. 당시 ECA가 타마냐에게 부과한
임무 중에는 한국의 금융상황 개요를 작성하는 등의 과제와 함께 “현재의 한국 상
황과 대한민국의 조직구조 및 ECA의 [대한 부흥]원조계획안을 기준으로 금융 분
야의 실행프로그램을 개관”하고 “ECA가 한국정부에 제공할만한 기술금융지원
(technical financial assistance)의 유형 및 방식을 건의”하라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
었다(Tamagna, 1949, p.1).12) 이에 따라, 타마냐는 1949년 5월 한국 금융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Financial Mission to Korea”)를 제출했다. 타마냐는 동 보고서
에서 “[한국의] 경제 및 금융 안정화 노력을 돕기 위한 ... 유형의 기술지원”과 “3-6
개월 기간에 걸쳐 경제학자와 은행검사역/운용역으로 구성된 연방준비제도 직원
1~2명”을 “자문관 자격으로 주한미사절단에 임시 배속”시킬 것을 건의했다
(Tamagna, 1949, p.Ⅲ). 한편, 타마냐가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하고 “중앙은행 재편
과 통화개혁”을 위한 기술지원의 수용을 간곡히 권유한 사실을 밝힌 1949년 3월
14일자 비망록도 동 보고서에 수록되었다(Tamagna, 1949, Appendix Ⅰ, p.2).13)
금융기술지원팀 파견을 국무부에 처음 건의한 주체가 AMIK(실제로는 주한ECA
로 추정; 각주 10 참조)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술지원이 부흥원조를 위한 주
한ECA 경제안정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모색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